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수년째 적자임에도 매년 직원들의 성과급을 꼬박꼬박 챙겨주는 회사가 있습니다. 기본급도 빠짐없이 올려주고요. 오랜 경영난으로 사업의 지속성, 미래 경쟁력까지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회사는 직원들에게 매년 아낌없는 투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본사로 두고 있는 '한국GM'의 이야기입니다. 한국GM은 2014년 이후부터 작년 말까지 5년째 연간 적자를 기록 중입니다. 누적 적자만 4조 7000억원에 달하죠. 매출도 10조원 밑으로 떨어진 지 좀 됐습니다. 그런데도 직원들의 기본급과 성과급 만큼은 매년 꼬박꼬박 올려주고 있습니다. 역시 외국계 기업이라 클라스가 다른 듯 합니다.
쉐보레·캐딜락 CI(출처=한국GM 홈페이지)
그런데 이는 사실 회사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직원들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노조가 매년 파업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인 것이죠.
한국GM 노조는 매년 벌이는 임단협(임금단체협상)에서 사측과 말이 좀 안통한다 싶으면 매번 파업을 단행했습니다. 무분규였던 적도 있지만 손에 꼽힐 정도였죠. 흑자가 나면 이익이 났다해서, 적자가 나면 미래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사측이 이를 거부하면 매번 파업을 밀어부쳤습니다.
승리는 늘 노조 편이었습니다. 파업만 하면 기본급과 성과급이 항상 올랐습니다. 사측은 매번 '공장 철수'를 내세워 강경 대응했지만, 어떻게든 공장이 멈추는걸 막아야 하는 입장에선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 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GM노조는 2012년 이래 2017년까지 총 357일 파업을 하고도 1인당 성과급 6150만원, 1인당 기본급 46만원 인상을 챙겨받는데 성공했습니다. 같은 시기 한국GM의 연간 판매량은 8만대에서 5만대로 쪼그라들었는데 말이죠.
한국지엠 연간 판매량(출처=한국GM 자료)
노조의 뜻이 매번 관철된 건 아닙니다. 한국GM은 지난 2018년 판매량 저하와 파업으로 일궈낸 '저생산 고임금' 구조가 고착되면서 법정관리 위기에 직면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도 노조는 여전히 기본급과 성과급 인상을 요구하고 있었고요. 이에 GM은 군산공장을 닫아버리는 결정을 내립니다. 가동률이 저하된 탓이 크지만, 사실상 노조에 대한 엄포였던 셈이죠. 당국과 지역 경제는 물론 노조도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말 뿐인 줄 알았던 공장 철수설이 현실이 됐으니까요.
이후 당국의 공적자금 투입으로 부도 위기를 넘기고, GM이 10년 내 한국 시장 철수 금지를 결정하면서 사태는 진정세에 접어들었습니다. 노조도 모처럼 기본급과 성과급 동결을 결정하며 꼬리를 내렸고요.
하지만 얼마 못 가 노조는 다시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공적자금 투입 1년 만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까지 일으켰더랬죠. 한국GM 노조가 총파업을 한 건 1997년 이후 22년 만입니다.
노조는 매번 왜 이런 결정을 하는 걸까요. 아무리 임금이 오른다고 해도 회사의 어려운 사정은 누구보다 잘 알테고, 나름 그쪽 세계에서도 회사의 적자 상황에선 무파업이 관행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일각에선 사측에 대한 노조의 불신이 그만큼 뿌리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측이 스스로 제시한 약속을 어기는 일을 반복하면서 노조의 믿음을 저버렸다는 것이죠. 일례로 사측은 지난 한국GM사태 당시 당국과 협의하면서 2종의 신차 배정과 신차 개발과, 그리고 설비투자에 약 28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 5년 간 15종의 신차를 출시하겠다고도 했고요. 그 대가로 당국이 81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도 했죠.
하지만 2년이 다 돼도록 신차 배정이라곤 올해 초 출시한 트레일블레이저 1대가 전부입니다. 신차개발과 설비투자 역시 그 실체가 모호한 상황이고요. 여기에 최근 법원으로부터 혐의가 인정된 현 경영진의 비정규직 불법파견건은 사측에 대한 노조의 불신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입니다.
이 정도면 사실 노조를 딱히 이해 못할 바는 아니죠.
그런데 한켠에선 노조가 당국을 너무 '믿는 구석'으로 여겨서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출범 때부터 ‘일자리 정부’를 표방한 정부니 노조가 강짜를 부려 사측이 공장 폐쇄를 결정한다고 해도 당국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는 거죠. 대선 공약을 지키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공적자금을 투입해 자신들의 고용생존권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줄 거란 믿음이 저변에 깔려있단 분석입니다. 이는 이미 2018년 한국GM사태 때 정부가 공적자금 8100억원 투입으로 입증해준 바도 있고요.
노조는 분명히 알고 있을겁니다. GM이 한국을 떠날 이유는 차고 넘친다는 걸요.
정부가 혈세를 투입해도, GM이 10년 내 한국 시장 철수 금지를 약속했다고 해도 이익이 나지 않으면 얼마든지 한국 시장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이미 지난 2012년 호주 정부로부터 10년간 공장 유지를 조건으로 10억달러 지원을 약속받고 2억7500달러를 받고도 5년 뒤 완전 철수를 단행한 이력도 있고요.
또 정부의 공적자금은 한국GM이 이미 작년 한해만 3300억원에 이르는 손실을 냈고, 코로나 19 사태로 올해 전액 소진이 예상되는 상황에선 더이상 GM을 붙잡아 둘 빌미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GM은 최근 글로벌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에 맞춰 내연기관에서 전동화로 갈아타고 있는 중입니다. 내연기관 일색의 국내 공장 인력 구조조정은 언제고 거쳐야 할 일인 것이죠. 그 시기를 얼마나 늦추는 지가 관건일테고요.
그런데 말이죠. 노조는 최근 또 다시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2년 연속 임금 동결로 생활하기가 힘들어졌고, 그 고통을 해소하는 차원에서라도 이번에 어떻게든 임금을 올려받겠단 입장입니다. 구체적으론 기본급 월 12만 304원 인상에 성과급 2000만원. 2년치라 두배를 부른 듯 하네요. 그리고 사측과 타협이 아닌 장기전에 대비하겠다는 각오입니다.
사측이 부평공장 투자 철회와 한국 시장 철수로 맞서자 또 당국을 쳐다보네요. 정부가 해결하라 이거죠.
글쎄 정부가 지원해야 할 기업이 넘쳐나는 코로나 시대에 이미 지급한 ‘혈세값’도 전혀 못하고 있는 기업을 도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더 절박한 쌍용차에게도 자생을 요구하고 있는데 말이죠.
올해 1월 16일 글로벌 SUV 트레일블레이저 출시 행사장에서 카허카젬 한국GM사장과 김성갑 한국GM 노조위원장(출처=한국GM)
"△GM 내 가장 경쟁력 있는 좋은 공장을 만들자 △8100억원이라는 공적자금 투입으로 새로운 공정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사회적 책무가 명확하게 있다 △이익 뿐 아니라 사회적 책무에 대한 충분하게 신경을 쓰고 사회 과정에서 책임을 지겠다".
이 말은 김성갑 전국금속노도조합 한국GM 지부장이 올해 초 트레일블레이저 신차 출시 행사에서 호기롭게 발표한 내용입니다. 10개월이 흘렀습니다. 한국GM공장은 GM내 가장 경쟁력있는 공장이 돼 있는지, 8100억원에 대한 사회적 책무는 다 했는지 궁금하네요.
노조가 직원들의 대표로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회사가 존폐위기에 빠져있다면 파업보단 대화를, 투쟁보다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직원들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어차피 장기전으로 가겠다면 말이죠.꿈이랄까, [넘버스]한국GM희망 같은 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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